해탈이라고 하여 그저 그런 것이 아니고 거기에는
사후에도 그런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신비한 어떤 경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근본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본래 갖고 있는 영원한 생명 속에 든 무한한 능력을
개발할 것 같으면 귀종선 선사도 될 수 있고,
혜공스님도 될 수 있고, 달마대사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공부만 부지런히 하면 자유 자재한 해탈을
성취할 수 있다 이것입니다.
그 근본 골자가 어디 있느냐 하면 도를 깨쳐 영겁불망(永劫不忘)을
성취하면 영원토록 어두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난 번에 소개한 스티븐슨씨가 조사한 2000명 이상의 전생 기억은
아이들이 장난하는 물거품과 흡사한 것이지만
영겁불망, 이것은 허공이 무너질지라도 조금도 변함없는
대 해탈경계입니다.
그러면 그 영겁불망이라는 관문은 어떻게 해야 돌파할 수 있는가?
자고로 영겁불망의 생사해탈을 성취하려면
가장 빠른 길이 참선(參禪) 입니다.
참선을 하는데 있어서는 화두(話頭) 가 근본입니다.
화두를 부지런히 하여 바로깨치면 영겁불망이 안될래야 안될 수없습니다.
영겁불망 죽은 후에나 알 수 있는 것이지
생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숙면일여(熟眼一如). 즉 잠이 아무리 깊이 들어도 절대
매(妹)하지 않고 여여불변(如如不變)할 때
그때부터는 영겁불망이 되는 것입니다.
숙면일여라고 하여 깊은 잠이 들어서도 여여한 것이라고 하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혹 생각이 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옛날의 조사스님 치고 숙면일여한 데에서
깨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읍니다.
그러므로 깨치기 전에는 모든 것이
식심분벌(識心分別)로서 봉사영혼 아닙니까?
봉사영혼이 되어서 업(業)따라 몸을 받는 것입니다.
자기 자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가 지은 업대로 떨어져 버립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자기 자유가 조금도 없고 업따라 가는 것을
“수업수생(隨業受生)”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유로운 경계가 되면 내 마음대로 입니다.
김씨가 되든, 박씨가 되든, 여자가 되든, 남자가 되든,
마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의왕생(隨意往生)”입니다.
수의왕생 이것이 불교의 이상입니다.
그래서 「보살은 원력에 의해 태어나고 중생은 업력에 의해 태어난다.」
고 말했습니다.
수의왕생이 될려면 숙면일여가 된 데에서 자유 자재한
그런 경계를 성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제 아무리 아는 것이 많고
부처님 이상 가는 법문을 하고 큰 소리를 쳐도
몸 한번 바꿔지면 다시 캄캄해져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항상 강조하는 말입니다만
누구든지 아무리 크게 깨치고 아무리 큰 도를 성취했다고 해도,
그 깨친 경계가 동정에 일여(動靜一如) 하느냐?
몽중에 일여(夢中一如)하느냐?
숙면에 일여(熟眼一如)하느냐? 에 달려 있습니다.
실제 깨친 경계가 이러 하여야 비로소 바로 깨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정일여도 안되고, 몽중일여도 안되는 그런 깨우침은
깨친 것도 아니고 실제 생사에는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참선은 실제로 참선을 해 보아야 하고
깨침은 실제로 깨우쳐 봐야 합니다.
생사에 자재한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깨침이어야지
생각으로만 깨쳤다고 하는 것은 생사에 아무 이익도 없고
생사에 자유롭지도 뭇하며 그것은 깨침이 아니고
불교의 명(病) 이요, 외도(外道) 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공부가 실제로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어
영겁불망이 되도록 죽자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신명을 아끼지 말고 정진하여 불사의 해탈경계를 성취하고
해탈도인이 되어 미래겁이 다하도록
중생을 제도해야 될 것이 아니겠느냐! 이 말입니다.(끝)
**성철큰스님법문중에서**